H.P. 러브크래프트(1890~1937)는 크툴루 신화로 대변되는 공포 + SF 소설 작가다.
20세기 초에 몇몇 환상 소설 잡지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알리고 다른 유사 작가들과 함께
오늘날 환상 소설의 토대를 만드는 데 기여한 작가로 그가 만들어낸 기이한 생물체들과
신비한 세계관은 소설, 만화,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미디어로 재창조되고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봤지만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모 게임 번역을 하면서 해당 작품의 원작자와 러브크래프트의 연관성을
알게 되면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다른 일에 밀리고 다른 읽을거리에 밀려서 이 작가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서서히 줄어들 즈음에 황금가지에서 러브크래프트 전집 박스 세트를 냈다.
그때 옳다구나 싶어 구입은 했는데 사고 나서도 한동안 손을 못 댔다.
읽을 책들 순서를 정해놓다보니 우선순위에서 쭉~ 밀려서 그랬는데
이번 여름에 기회가 왔다. 몇 달에 걸친 번역 작업이 끝나고 쉬는 동안 이런저런 책을 읽고
러브크래프트 전집까지 순서가 돌아온 것이다. 읽어본 결과, 정말 엄청난 작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당시 최신 이론이었던 대륙 이동설도 반대 없이 수용했으며
지질학이나 지구 연대에 대한 지식이 능통했다. 우주와 관련된 관심과 지식도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며
상대성 이론 같은 물리 이론도 일부분 제시한다. 물론 얼마나 깊이 아느냐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자신만의 가상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다양한 지식을 적재적소에 잘 적용했다.
또한 건축에 대해서도 식견이 뛰어났던 모양인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도심 정경 묘사가 뛰어나다.
그밖에 자연 풍경 묘사 역시 상세한 것을 보면 뛰어난 관찰력과 그것을 풀어내는 능력이 모두 갖춰졌던 게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1, 2권을 읽었는데 그가 창조한 세계관과 설정을 계속 접하다보면 마치 가상의 역사서를 읽는 느낌이 든다.
실제 지명과 장소에 가상의 지명과 장소를 더하고 여러 작품의 사건 사이에 접점을 두거나 공통된 등장인물을 제시하여
연결성과 흥미를 돋운다. 대다수 작품이 1인칭 시점에서 사건을 서술하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화자가
다른 이야기에서 언급되거나 등장인물로 나올 때 왠지 모를 반가움이 느껴진다. 이것이 어떤 부분에서 작품 간의 연관성이
나타나는지 더 몰입해서 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드래곤 라자를 본 후에 퓨처 워커나 그림자 자국을 보면서
후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괜히 기대하거나 실제로 나왔을 때 즐거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 각종 매체를 통해 공포물을 많이 접한 탓인지 글을 읽고 공포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애초에 공포감을 즐기려고 이 책을 구입한 건 아니니까 큰 상관은 없지만...
또 상세한 정경 묘사에 비해서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
아무리 묘사가 세밀하고 정확해도 내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19세기의 조지아 풍 건축 양식이라든가 우주 생물체를 묘사한 부분에 많은 공이 들긴 했지만
글만 보고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내기보다는 사전 지식이 있거나 미리 만들어진 그림이나 사진을 보았을 때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분명히 더 쉬울 것이다. 작품 초반에는 항상 정경 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여기서 조금 따라가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흥미진진한 내용이 물밀듯이 이어진다.
1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인스머스의 그림자>, 2권에서는 <시간의 그림자>였다.
책 전반적인 내용이나 개별 작품에 대해서 만한 내용은 많은데
오늘은 블로그를 너무 오래 잡고 있어서 피로한 탓에 여기서 그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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