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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 재미/책

국어 번역문과 번역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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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제목은 《형태 분석 비교 코퍼스에 기반하여 다학문적으로 고찰한 국어 번역문과 번역 글쓰기》이다. (여기서 코퍼스(corpus)란 우리 말로 '말뭉치'에 해당한다.)
나는 서점을 가면 습관적으로 국문학이나 국어 관련된 코너로 가서 읽어볼 만한 책이 없나 살펴보는데
이 책 역시 그러던 중에 발견한 것이다.
2010년 7월 7일에 서점에서 구입했는데 번역 초보였던 당시(물론 지금도 초보이지만.)에 슬쩍 페이지를 넘겨본 바
아무래도 읽어볼 가치가 있을 듯하여 비싼 가격(22,000원)에도 곧장 집어서 구매했다.

제목에도 보이듯이 다루는 소재는 국어 번역문이다.
애초에 책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쓴 글이 아니라 논문을 책으로 펴낸 종류인데 두께가 꽤 된다.
본문 내용만 해도 380쪽에 달한다.


책 뒷표지에 나온 서문의 발췌문을 보면 이 책의 목적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의 의의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동안 번역문의 특성과 문제점을 논의한 연구는 그 자료가
일부 텍스트에 한정되었던 데에 반해 본 연구는 대규모 코퍼스를 대상으로 하여 비번역문과 번역문을
비교분석함으로써 번역문의 특성과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와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번역 보편소와 국어 번역문의 언어적 특성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둘째, 번역학은 통합 학문의 성격을
띠므로 인접 학문의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데, 본 연구는 국어학뿐 아니라 작문학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그동안 번역학에서 소홀하였던 번역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번역 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이 책은 단순히 기존 번역문의 문제점을 집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번역 또한 '글쓰기'라는 점에 착안하여
더욱 한국어답고 자연스러운 번역문을 쓰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제공한다.
우선 논고의 연구 방식을 설명하고 '번역 글쓰기'의 개념과 원리를 제시한 후 수많은 기존 번역문에서
방대한 자료를 추출하여 현대 국어 번역문의 공통적인 특성을 밝혔으며, 이를 토대로 번역 글쓰기의 과정과
좋은 번역문을 위한 전략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또한 대학과 대학원에서 필요한 번역 글쓰기의
교수-학습 방안에 대해서도 적절한 대안을 제시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부분은 2장에 나오는 '번역 글쓰기의 개념과 원리'
그리고 4장 '번역 글쓰기의 과정과 전략'이다. '번역도 글쓰기다.'라는 생각이 특별히 참신하다고
보지는 않지만, 저 두 챕터에서 번역가가 이론적으로 알아둬야 할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을 직접 해봤기에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부분은 실제로 어디에서 이렇다, 또 저기에서 저렇다.'라고
수긍하면서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번역을 업으로 삼기 전이라도 미리 알아두면 실제 번역 작업을 할 때
계획을 세우거나 시행 착오를 막는 데 도움이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국어 번역문의 특성을 어휘, 구문, 담화 수준에서 직접 수많은 자료와 함께 소개한 3장은 너무 길어서
꼼꼼이 읽지 않았다. 사실 내용이 길다기보다, 용언, 체언, 조사, 부사 등 문장 구성 요소 수준으로 쪼개어
번역문과 비번역문의 차이점을 대조한 챕터라서 어떤 동사가 번역문에 많고 어떤 부사는 비번역문에 많다느니
하는 단순한 설명만 가득한 탓에 굳이 자세히 읽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 까닭이다.
그러나 번역문에서 전반적으로 자주 나타나는 번역투라든가 상투적인 번역 형태에 대해 아주 자세히 분석한
장이므로 결국은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책의 마무리 부분에서 저자도 나름대로 논문에서 다 다루지 못한 아쉬운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텍스트 분석을 위해 사용한 번역서가 주로 1990년대 책이라는 점, 그리고 번역투와 상투적인 표현을
문제점으로 들면서도 저자가 논문 자체에 종종 그러한 표현을 썼다는 사실이 다소 아쉽다.
물론 논문은 정보 전달을 위해 쓰는 글이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막상 문제점으로 지적한 부분이
본문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 번역문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자 원문과
기존 번역문을 제시하여 수정문을 보여주는 사례에서도, '실제로 번역서에 저런 식으로 나와 있단 말인가?'하고
의구심이 드는 번역문이 가끔 보였다. 사례문이 이따금 표현 면에서 지나치게 어색해서 마치 번역문의
일반적인 문제점을 소개하려고 일부러 기존 번역문을 어색하게 고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정말 예시대로 기존 번역서에 나온 표현이 그렇게나 국어답지 못하다면, 이는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내 번역만 해도 고민하고 책임질 게 산더미 같아서 국내의 전반적인 번역 수준까지 걱정하는 건
월권(?)(이고 내가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혹은 사치, 또는 시간 낭비란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번역문이든 뭐든 글은 독자가 읽기 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색하고 읽기 불편한 글들이
넘쳐난다니 내 마음이 괜히 불편할 지경이다.

'-에 의해' '만들다' '가지다' '-를 통해' '대하다' 같은 이른바 영어 번역투를 쓰지 말고 조금 더 자연스럽고
한국어다운 표현으로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왔는데, (물론 이런 내용은 다른 번역 기술서나 번역학 책에도
자주 나온다.) 그렇다면 번역투에 속한 여러 가지 표현이 '영어가 들어오기 전인 옛날에는 우리 말에 아예
없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월 달에 한국어 단편 소설집을 보면서 50년대 소설부터 표현 면에서 약간 차이가
생긴 걸 느끼긴 했는데 비번역문에 침투한 혹은 기존에 존재한 '이른바' 현대어 번역투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읽질 않아서 그때부터 이 점은 계속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은 번역가가 결국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점에서 공부 삼아 읽어볼 가치가 있다.
논문인 데다가 어찌 보면 번역학 책에 속하기에 아무런 재미도 찾기 어려울 만큼 내용이 딱딱하지만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어느 정도는 답을 줄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막바지에는 번역 글쓰기 교육에 대해서도 다루기에 번역 교육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할 것 같고,
이 책 자체를 교본으로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단 《번역의 공격과 수비》처럼 번역가의 필독서로 생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읽어두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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